💌 줌 인~, 줌 아웃~

2024. 10. 31.

💌 줌 인~, 줌 아웃~

안녕하세요, 님. 🧚에디터 전영주입니다.

지난 5월 예술공간 의식주에서 열린 최수경 작가님의 개인전 《하얀 땅을 걷는 투명한 무지개》를 보았는데요. 개인전에서 본 그림 중에 〈Orange sunset〉이 특히 기억에 남았어요. 전시를 다 보고 떠나는 중 전시장 계단에서 그림에서 본 것과 비슷한 작은 무지개를 발견했거든요.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마주친 장면은 정말 잠깐이었지만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는 그림을 그리는 최수경 작가님(@flowsook)을 이번 레터에서 소개합니다.

🧚 (전영주 에디터) 안녕하세요 최수경 작가님! 작가님의 개인전을 인상 깊게 보았는데요. 루더우레터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간단한 소개 부탁드려요.

🌹 (최수경 작가) 안녕하세요, 루더우레터 구독자 여러분! 저는 흘러가는 순간의 아쉬움을 섬세하게 담아내는 작업을 하는 최수경입니다. 역행할 수 없는 시간 속에 수분을 머금다 이내 증발하여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장지 위에 스미듯 눌러 담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한때 수변*을 몇 년간 지속해서 그려왔는데요, 그래서 〈유수에 우주를 담아〉라는 작품으로 저를 먼저 소개하고 싶어요. 지금은 수변을 넘어서 마주한 풍경 속 지나간 흔적에 집중하여 작업하고 있습니다.

*수변: 바다, 강과 같은 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우주에 유수를 담아, 2023, 장지에 채색, 162.2 × 224.2 cm

🧚 (전영주) 작품을 처음 봤을 때 굉장히 사실적으로 풍경을 그리고 있다는 게 제일 먼저 눈에 띄었어요. 특히 〈흔들리는 장미〉는 근경을 그렸음에도 배경을 아웃포커스 처리해 시간이 멈춘 듯 보여 그 장면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왜 이런 설정으로 그렸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떤 감상을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하는지 궁금해요.

흔들리는 장미, 2023, 장지에 채색, 72.7 × 72.7 cm

🌹 (최수경) 당시 담장에 장미가 피기 시작한 5월이었는데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봉우리도, 흐드러지게 핀 꽃도 있었어요. 사실 야생 장미라 그다지 예쁘지 않아서인지 봉우리에 새삼 눈이 갔었어요. 그 모습에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바람이 불어 초점 맞추기도 쉽지 않았고 밤이라 제가 잘 찍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렇게 사진을 찍고 확인을 하니 그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재밌었습니다. 사진을 이용해 섬세한 부분까지 묘사한 것에 더해서 사진 기법 자체를 가지고 와도 흥미로울 듯했어요. 이런 지점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흔들리는 장미〉입니다. 아웃포커스의 사진적 장치가 관객이 이 작품을 볼 때 그 현장으로 다시 데려다주길 바라요. 일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저는 이 그림을 보면 다시 그곳에 제가 있는 거 같기도 합니다.

Orange sunset 2024, 장지에 채색, 162.2 × 260.6 cm

🧚 (전영주) 가까운 풍경을 그린 〈흔들리는 장미〉와 달리 〈Orange sunset〉은 원경을 주제로 핀 포커스의 사진을 활용한 듯 보이는데요. 창문 너머의 먼 경치를 그리면서도 창문의 물때나 손자국 등 근경 또한 촘촘하게 표현되고, 이런 복잡한 원경과 근경이 중첩된 모습은 장엄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작가님이 근경과 원경을 각각 주제로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있을지 듣고 싶어요.

🌹 (최수경) 근경은 주제가 되는 대상만이 명확하게 보이지만 원경은 근경보다 많은 요소가 보여요. 〈Orange sunset〉과 〈겨울에서 겨울〉은 시각의 ‘혼동’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싶었어요. 내가 보는 게 물때인지 빛의 표현인지 혹은 내리는 눈인지 모호하기도 하며, 결국 무엇을 바라보냐에 따라 초점이 달라져요. 〈Orange sunset〉에서는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가는 세상 안에서 나의 시선을 가로막는 빛에 의해 반짝이는 물때, 〈겨울에서 겨울〉에서는 눈인지 창문에 붙은 먼지인지 헷갈리게 하는 ‘혼동’, 이것이 원경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지점입니다.

겨울에서 겨울, 2024, 장지에 채색, 162.2 × 260.6 cm

🧚 (전영주) 앞서 이야기했던 작품을 보면 작가님이 아웃포커싱 등 사진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거나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작품 〈물방울 장미〉에는 사진을 찍는 핸드폰의 그림자를 그대로 그린 것이 보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작가님은 그림을 그릴 때 사진을 중요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에서 사진이 하는 역할과 사진에서 보이는 효과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이유를 듣고 싶어요.

🌹 (최수경) 가끔 기억 속이나 눈동자 안에 박제하고 싶은 장면 다들 하나쯤은 있잖아요? 저는 그럴 때마다 얼른 사진을 찍어요. 물론 가만히 명상하듯 대상을 바라보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 희미해지는 기억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요. 사진을 회화 작업으로 옮겨 작품을 완성했을 때 생기가 도는 것 같아요. 포슬포슬한 한지 위에 그려진 대상이 당시의 희미한 기억을 필터로 씌운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며 저와 함께 호흡한다고 느껴요. 그러다 보니 이파리에 드리워진 저의 그림자, 사진 찍을 당시 핸드폰 렌즈를 투과한 빛 도상들도 결국 제겐 대상을 바라보던 당시의 분위기를 직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요소이기에 생략하지 않았습니다.

물방울 장미, 2023, 장지에 채색, 72.7 x 53 cm

〈Moving sunset〉 시리즈, 2024, 장지에 채색, 각 65.1 × 53 cm

🧚 (전영주) 〈Moving sunset〉 시리즈의 비슷한 풍경을 다양한 색조로 그려내는 방식에 관심이 갑니다. 서로 다른 시간대인 듯 보이기도 하고, 비슷한 시간대에 아주 찰나의 순간 변하는 빛을 포착하는 것 같기도 해요. 이렇게 시리즈로 작업하는 이유와 이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요?

🌹(최수경) 하루의 긴 시간을 작은 방 한 칸 저의 작업실에서 보냅니다. 종이 색이 바랠까 봐 햇빛 한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모든 창을 막아 놓은 이곳은 제가 의식해서 시간을 보지 않으면 현재 몇 시인지조차 알 수 없어요. 유일하게 막지 않은 작은 창이 있는데 일몰의 시간에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거의 정면에서 볼 수 있어요. 분 단위로 변해가는 노을의 색은 참 다양해요. 한 자리에서 다양한 풍경을 보다 보니 일종의 ‘수집’의 의미로 장면을 모으기 시작했는데요. 같은 자리에서 찍은 사진이라도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데 한 장면만 그리는 것이 아쉬워 시리즈로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최수경) 〈Moving sunset〉에서 단순히 노을의 색만 중점적으로 본 것은 아니에요. 창틀의 때, 방충망, 환풍기의 선 등 제가 창밖을 보기 위해 거쳐야 했던 것들도 분명히 존재해요. 시간의 흔적을 보여주기도 하고, 작업으로 옮겨졌을 때는 당시의 시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요. 보고자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주변을 이루는 환경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그 전체가 모였을 때 원했던 본질이 보이더라고요. 저는 〈Moving sunset〉 시리즈가 누군가의 향수를 자극하길 바랍니다. 많은 분이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자취하던 방에서 보던 풍경 같아 울컥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 시리즈를 통해 작품을 보시는 분들의 기억을 건드렸으면 해요.

🧚 (전영주) 작가님의 작품에서 또 재료와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작가님의 노트에 빼곡히 적힌 메모와 붙여둔 장지 조각을 보면 재료를 아주 예민하게 다루고 통제하려는 노력이 보입니다. 또 그림을 그릴 때도 수도 없이 붓질을 중첩해 원하는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 경이로울 만큼 정교한 과정을 거치는 것 같아요. 앞서 이야기한 과정으로 그린 그림은 작가님의 태도와 닮아있어 더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그림을 그리고 재료를 준비할 때, 또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특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그 이유와 함께 자세하게 알고 싶어요.

🌹 (최수경) 제가 사용하는 장지는 종이의 질이 그때그때 다른 경우가 있어요. 아무래도 사람이 만들기도 하고 습기에 취약하기 때문에 매우 예민한 재료입니다. 아교 반수(코팅)를 했음에도 종이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텁텁하게 스미거나 과한 얼룩이 생겨 작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태라 판단되면 갈아엎기도 합니다. 따라서 종이를 구매한 날짜, 구매처, 상태, 종이 조각에 채색 실험한 결과를 작업일지에 적어놓아요. 연한 농도의 물감을 수없이 레이어를 쌓아 올리는 작업 특성상 밑바탕이 되는 지지체부터 견고해야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작업에 있어서 일정한 템포를 유지하기 위해 매번 총 작업시간도 적어놓아요. 긴 호흡을 위한 저만의 루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