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이아몬드💎보다 희귀한 돌이 있다?

여성 예술인이 쓰는 재료를 리뷰하고 이야기합니다.

2023. 10. 31.

여성 예술인이 쓰는 재료를 리뷰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을 기만한 죄로 영원히 산 정상에 바위를 올려놓아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 이 시시포스 이야기가 사실은 사람의 삶을 비유했다는 거, 님은 알고 계셨나요? 유한하기에 살아가는 과정에 의미가 있는 삶에 빗대어 시시포스의 형벌을 해석하기도 한대요. 음, 그래도 저는 시시포스처럼 힘들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서인지 일부러 고된 과정을 선택해서 작품을 만드는 작가를 보게 되면 더 궁금하고 관심이 생깁니다. 경외감이 들기도 하고 재료나 과정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거든요. 이번 루이즈 툴즈에서는 모두가 선택하는 보편보단 대안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풀어나가는 박소정 @pmcrri 작가님의 툴을 소개합니다.

《The Right to Choose Where to Die》(2023, Kunstakademie Duesseldorf) 전시전경

💬 안녕하세요! 저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공부 중인 박소정입니다. 판화, 애니메이션, 인터렉티브 아트, 실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다뤄 작업을 하는데요, 그중 제일 애정을 품고 있는 석판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요. 2018년부터 우연한 계기로 석판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현재까지 좋아하고 잘 사용하는 재료입니다. 웃기게도 학교에서 Lithography(리토그라피)* 워크숍이 Risograph(리소그라프)**인 줄 알고 덜렁 맨몸으로 갔다가 석판을 여덟시간 갈게 된 계기로 석판화와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 석판화: 석(石)판 위에 그림을 그린 후 인쇄하는 판화 기법으로, 물과 기름의 반발력을 이용한 평판화의 일종

** 리소 인쇄: 실크스크린 방식의 디지털 공판인쇄기

The Right to Choose Where to Die (detail-human #1), 2023, lithography on hahnemühle paper, 60 × 800cm

💬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만큼 석판화는 독일에서도 굉장히 생소한 판화방식입니다. 최근 들어 디지털 인쇄 방식이 사랑받다 보니, 점점 석판화를 할 수 있는 작업실이나 작업자도 줄어가고 있어요. 저도 5년 이상 꾸준히 석판화 작업을 해왔지만 혼자 작업실을 차린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까마득하고 어렵습니다.

The Right to Choose Where to Die (detail-human #2&3), 2023, lithography on hahnemühle paper, 60 × 800cm

💬 석판화의 재료는 생각보다 구하기 어렵고 다루기 까다로워요. 우선 석판* 하나만 해도 50 × 60cm 크기에 약 15kg으로 아주 무겁습니다. 석판을 옮기는 수레부터 인쇄기(석판 프레스기), 그리고 미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석판화용 잉크까지 준비할 것이 많고요. 심지어 5가지 색으로 인쇄하려면 각 색상에 맞게 똑같은 크기의 석판 다섯 개가 필요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재작년 독일에 큰 홍수가 터지면서 많은 석판이 물에 잠겨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주재료인 석판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고, 인쇄기 또한 더 이상 생산하는 곳이 없으며 전문가가 없으면 해체, 운송, 재조립도 불가능합니다.

* 수급의 한계로 얇은 알루미늄 판에 돌처럼 표면처리를 한 '마판'이 사용되기도 한다.

* 석판 인쇄기의 부품(누르개)을 직접 제작하는 모습

** 가죽 밀대 (롤러)

💬 석판화는 처음 석판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네 가지의 굵기가 다른 모래를 제일 굵은 것부터 제일 가는 것까지 순서대로 그라인더로 갈아주어야 하는데요. 부드러운 세필화나 음각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는 가장 부드러운 모래로 갈아주고, 노이즈가 있고 숨구멍이 많은 판화를 찍고 싶으면 제일 입자가 거친 모래로 4~5회 정도 갈아주면 됩니다.

* 석판 그라인딩 과정

💬 그 후에는 기름을 흡수하는 석판의 특성을 이용하여 기름이 함유된 펜, 잉크, 연필 또는 목탄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려줍니다. 이때 손에 있는 기름이 돌에 닿지 않게 주의하며 종이를 깔아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름이 흡수된 곳에만 인쇄잉크가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석판화 작업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드리기 위해 소개용으로 만들었던 영상(링크)도 함께 첨부합니다.

* 석판 드로잉 과정 (유성 성분의 도구로 그린다.)

* 드로잉 후 테레핀유로 유성 성분의 드로잉을 지우는 과정.

인쇄할 수 있는 상태의 석판을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

드로잉한 부분(=유분이 있는 곳)만 잉크가 올라갈 수 있게 된다!

** 가죽 밀대로 잉킹하는 모습

* 잉킹 후 인쇄 과정

** 석판화 작업 공간. 가죽 밀대(앞)와 석판 프레스기(뒤)

💬 모래로 석판을 한 번 가는데 10분에서 15분이 소모되니, 돌을 가는 데에만 5시간 이상이 걸려요. 정말 말 그대로 왜 이렇게까지 작업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돌을 모래로 가는 과정에서도 모래 또는 물기가 너무 없거나 너무 오래 갈면 석판에 생채기가 나는데요, 그럼 다시 첫 단계로 돌아가야해요. 시시포스 형벌과 다름이 없습니다.

💬 이 번거로움에도 제가 이 재료로 계속해서 작업하는 이유는 ‘아름다워서’ 그리고 애석하게도 ‘번거로워서’입니다. 그리고 희소성이라는 가장 큰 강점도 있고요. 감상자들이 석판화로 인쇄된 작업물을 볼 때 어떤 재료를 이용했는지 단 한 번도 맞춘 적이 없어요. 사람들이 오밀조밀 모여 토론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작가로서 흥분되는 일도 없을 거 같습니다.

💬 저는 현재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펠릭스 바우어(Felix Bauer)라는 인쇄가에게서 배우고 있습니다. 쾰른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 가면 손수 만든 서랍장, 철제 수레, 휴지 걸이, 도구 걸개 등이 있어요. 그것을 보면 20년 넘게 한 우물만 판 장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 물밀듯이 들어오는 미디어에 개의치 않고 꾸준히 한 재료로 작업하는 모습은 저에게 큰 귀감이 되어요.

* 펠릭스 바우어의 쾰른 작업실

How to Mourn Dead Pigeon - 4th Body, 2023, lithography on japanese bamboo paper, 40 × 48cm

How to Mourn Dead Pigeon - 4th Body (detail #1&2), 2023, lithography on japanese bamboo paper, 40 × 48cm

📮 추신

잘 쓰이지 않는 기법이 점차 잊혀 간다는 게 참 마음이 아파요. 독일에 처음 갔을 때는 편지 안에 동봉된 열쇠에 왜 이렇게 구닥다리 같냐고 툴툴거렸는데, 이제는 옛날 것을 쉽게 바꾸려고 하지 않는 문화 덕에 아직 석판화가 유럽 안에서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연히 접한 석판화에 위로받으며 꾸준히 작업하게 된 저처럼, 구독자님도 만약 지금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면 우연히 시작한 무언가가 큰 기쁨으로 돌아오길 바라요. 그리고 감기 조심하세요!

박소정

애정을 품고 있는 존재에게 닥친 문제점에 대하여 개인의 삶을 투영하며, 보편적이기보단 대안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가는 작업을 합니다.

개인전

2021 Bewegungsdrang, Neuland, 본, 독일

주요 단체전

2022 Jahresgabe 2022, Kunsthalle Düsseldorf, 뒤셀도르프, 독일

2021 KUNSTHALLE PROJECT, 투룸매거진, 온라인

2021 Open Office, Astaraum Oberbilker Allee 57, 뒤셀도르프, 독일

스크리닝

2023 Julia Stoschek Foundation, 뒤셀도르프, 독일

2023 WHERE ARE WE NOW?, Löwenpalais, 베를린, 독일

석판화를 하는 이유가 ‘아름답고 번거로워서’라는 박소정 작가님의 말이 인상적이에요. 늘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하는 저에게 놓친 것이 없나 돌아보게 하는 한마디입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지름길이 아니라 가보지 않은 길로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번거롭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될 수도 있잖아요.

🧚 전영주 에디터